성령충만 해야 할 이유(성령충만의 은혜)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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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해야 할 이유 (사도행전 4장 5절~12절) 2020년 11월 8일(주) 큰나무교회 주일낮예배 4차 산업혁명시대로 일컫는 현대는 더욱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며 더더욱 예측 불가능한 시대속에 진입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더 경쟁적이고 더 소유하고 더 편리한 사회속에 살고 싶은 인간의 욕심도 끝도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시대속에서 사람들은 더 큰 불안과 근심, 염려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글로벌 시대를 넘어 이제는 글로컬 시대속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연구하고 시대를 본다면 우리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팽창하는 지구의 인구, 점점 더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몇몇 소수에 집중되는 부, 종교간의 갈등, 극성을 부리는 이단종교들의 득세, 기후변화로 인하여 중병을 앓고 있는 지구, 기근과 지진, 환경문제로 인해 겪는 자연의 변화등은 마지막 때 나타날 구체적인 현상들입니다. 이 것이 이미 성경을 통해서 예언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들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사며 멸망과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다수의 그리스도인 찾기가 아니라 하나님은 마지막 사명을 완수할 남은 자를 찾고 계시는 시대요 알곡과 쭉정이를 선별하는 시대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실패를 거듭하다 승리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당연히 승리하는 길을 붙잡은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와 성공 사이에 계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 이후 성령시대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어리석은 인생들을 보호하시며, 우리의 스승이 되셔서 갈길을 찾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신약은 사복음서 성령충만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기준으로 본다면 사도행전이 기준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이기고 승리하려면 성령의 도우심, 즉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조건입니다.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고, 행복한 삶은 마땅히 따라오는 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는 1. 두려움이 떠나갑니다.(승리하도록) 여러분은 무엇이 두렵습니까? 두려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알 수 없고 가보지 않은 미래도 두렵습니다. 어떻게 될지,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가 가져다 주는 두려움속에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바이러스 하나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멘붕에 빠져 정부의 기능마져 무너진 곳이 많습니다. 시골, 산촌에 살던 저는 자연스럽게 산에 갈 기회가 많았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뜻밖이었습니다. ‘산에 함부로 가지 말아라, 사람을 만난다.’ 이 말은 사람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적막한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갓난아기 때 아주 외딴 곳에 사셨던 부모님은 뒷산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와 간첩들이 혹시 들이닥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불을 끄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꽤 여러날 계속되었는데 이후 부모님은 외진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로 옮기셨습니다. 굳이 간첩이 아니어도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요 3년을 따라다니며 배웠던 제자들이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이야기하실 때 하나같이 그럴 수 없노라고 마치 자신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또 죽으시는 곳에 자신들도 따라 죽을 것처럼 큰 소리 쳤지만 다 도망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것은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모든 정신병적인 질병들,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등은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모든 것을 함몰시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인생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해 안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수 많은 장애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제자라는 이름으로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이나 재물이나 그 어떤 것을 가져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성령충만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넘어 제자의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충만후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공회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한 자리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이 곳은 바로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던 바로 그 서슬퍼런 유대인들의 공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합니다. 그렇게 침착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요 위로의 영이요 담대함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원수의 발앞에서 상을 펼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평안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는 2. 심지를 견고케 하십니다.(완주하도록) 제가 좋아하는 성경말씀중 하나는 이사야 26:3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렇게 살고 싶고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 싶지만 이렇게 살기 쉽지 않고 연약한 제 모습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끝까지 신앙승리 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 성령충만의 역사는 제자들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두려워 숨기에 바빴던 그들이 자신들을 드러내어 복음을 증거했고 유대인들의 공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더니 5천명이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가슴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복음의 열정이 폭발한 것입니다. 이 전 같았으면 이 열정이 얼마나 갔을까 싶습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 것은 흔들림없이 오래 가는 것입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100m 결승점 앞까지는 내가 일등했어 라고 하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어디가 인생의 종착점일까요 그 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종착점입니다. 우리 교단에 존경받는 목회를 하시는 목회자 두 분이 기독교TV ‘새롭게 하소서’에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참 진실한 목회자들이요 교단을 떠나 초교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는 분들입니다. 마지막 기도제목을 묻는 사회자 질문에 사모님이 “진짜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기도제목속에 녹록치 않은 목회현장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잘 가다가 끝에 구설수에 오르고 불명예스럽게 은퇴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인 듯 싶었습니다.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 것도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흔들어 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반드시 믿음의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는 3. 지혜가 임합니다. (탁월한 삶을 살도록) (13) 전날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했고 그 곳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 믿는 자가 수 없이 생겨났는데 남자만 오천이나 되었습니다. 그 곳에 있었던 성전 맡은 자(경비대장)와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다가 가두었습니다. 이들은 공회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하기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쳐준 일이 있었는데 이 것도 그들에게는 못마땅하고 트집잡는 일이 되었었습니다. 공회에 붙잡혀 온 베드로와 요한을 보며 대제사장들은 무시하고 얕보는 시선이 있었습니다. 쉽게 갈릴리의 무식한 촌놈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관리들 앞에서 말합니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9~10) 듣던 이들이 놀랍니다. 이들의 담대함에 놀랐고 그들의 언변에 놀랍니다. 베드로가 놀라는 이들에게 덧붙여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 많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대제사장과 관리들은 이들을 무시했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13) 갈릴리의 촌놈 정도로 알았다가 놀랐다는 말씀입니다. 이 들이 자신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자신들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이들은 탁월했습니다. 지혜가 있어야 설득이 되고 감동을 줄 수 있는데 성령충만으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을 더하여 주시니 오천명의 군중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대제사장과 관리들도 이들의 탁월함에 놀라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게 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하고,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도 구별하게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해야 할 때, 선포해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공격적이고 경쟁속에서 예민해져 있는 사람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듣게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완악하고 이기적인 현대인들은 마음이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영이 임하면 저들의 마음의 빗장을 열어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열매를 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는 4. 사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완수하도록)(12)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이기에 자신들도 그렇게 살고 자녀들도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 갑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야 행복을 얻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행복하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던 것입니다. 큰 기쁨은 받을 때보다 줄 때 생겨납니다. 잘 먹고 잘 입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기쁨이 있지만 행복의 차원은 분명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 분병해질 때입니다. 제자들은 고기를 잡을 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살기에 바빴습니다.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살며 매일 매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기를 잡을 까 고민했고 그 것으로 기뻐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며 살았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살게 하실 때 그들은 비로서 참된 행복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 질 때입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목적, 거룩한 사명을 붙잡게 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성령충만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해볼려고 발버둥치며 제자의 체면을 세울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경험한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가서 외치는 자가 되었고 공회에 붙잡혀 와서도 대제사장과 관리들을 향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고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전도자가 되었고, 사명에 붙들려 외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사명을 붙들고 씨름하며 행복한 사명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를 집어삼킬 듯 닥쳐오는 세상 물결과 두려움을 넘어서게 합니다.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떨쳐내고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달려가게 합니다. 세상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덧입히시고, 선한 영향력을 끼쳐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도록 능력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세상을 살리는 자가 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외치는 자로 살게 합니다. 성령충만을 위해 엎드립시다. 성령충만해야 할 이유는 너무도 간단합니다. 신앙승리를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와 죄악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사명을 완수하고 잘했다 칭찬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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