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10) 어린양 예수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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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예수 (요한계시록 5장 1절~14절) 2020년 10월 11일(주) / 큰나무교회 주일낮예배 금주에는 송영자 집사님 장례가 있었습니다. 이별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유족들이 감당해야 할 슬픔과 상실감은 한 동안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간 성도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분명히 위로받고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시작되는 1절의 요한이 환상 중에 본 보좌에 앉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루마리에 쓰여진 대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 것은 곧 심판으로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심판의 주관자는 어린 양으로 대변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만물에 대한 심판과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으시고(요5:22) 그 권세를 행하실 분이시며 분명히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되면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종말과 재림에 대한 간절한 열망은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5장의 주된 내용은 인봉된 두루마리와 어린 양 예수입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분명 종말에 성취될 하나님의 비밀임은 분명한데 봉인된 까닭에 그 내용을 알 수 없고, 두루마리를 여실 수 있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증거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까요? 1.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6~7) ‘어린 양’의 개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를 430년간 했습니다. 야곱 때 애굽으로 내려간 70명의 식구들이 이 기간동안 200만명 이상의 대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애굽의 바로 왕 앞으로 보냈지만 쉽게 내어주지 않다가 마지막 장자의 재앙을 내릴 때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어보내게 됩니다. 장자 재앙은 각 가정의 첫 번 태어난 남자 그리고 짐승의 첫 번째 수컷까지 다 죽게 되는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출11:5~6) 이 일로 애굽에 큰 울음이 밤 하늘을 진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는 울음이 없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어린 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코자 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흠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열 나흗날 해 질 때에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와우 문설 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3)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장자들이 넘어지던 그 날 밤에 다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은 어린 양의 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매번 자신의 죄, 공동체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대속재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반복되는 제사는 그들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 대속재물되심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이제는 더 이상이 짐승의 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재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것으로 믿음은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역을 마치셔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올 때 제자들을 향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하시면서 이 구원의 길을 한 마디로 정리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흔들릴 수 없는 진리중의 진리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에 대한 심판과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으셨습니다.(요5:22)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때에는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심판하면 먼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징계가 먼저 떠 올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준비된 자들에게 심판은 징계가 아니라 심판주이신 예수그리스도께 상급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25장에서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까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마지막 때, 심판의 때를 준비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게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주인으로부터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을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기쁨으로 달려갔고 그 두 사람의 보고를 받은 주인의 반응은 과연 그러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면서도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자들과 미리 기름을 준비하였던 이들의 모습은 대비됩니다. 기름을 준비했던 이는 언제 신랑되신 예수께서 오시던지 문제가 없습니다. 허둥지둥 댈 필요도 없고 오신다는 소리만 들리면 뛰어나가 맞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했고, 설마 설마 하며 이 땅에 미련을 두고, 허망한 것을 따랐던 이들은 그 때에 땅을 치며 통곡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요한은 환상중에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음도 보았습니다. 일곱인으로 봉하여 그 누구도 그 두루마리를 펴며 인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간직된 것이 분명한데 펴거나 볼 수 없어서 그 누구도 떼어 줄 사람이 없어 환상을 본 요한이 크게 울었다는 것입니다.(4) 그 때 이 십사 장로중 한 사람이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5)고 일러줍니다. 오직 예수만이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심판주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 봉해진 두루마리를 펴실 분이 예수님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서야 합니다. 믿음안에 죽은 자는 물론이거니와 어리석은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도 그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죽었던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산자들은 산자들대로 변화되어 주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안에서 살아 주님 앞에 선 자는 하나님의 나라로, 믿음안에 있지 못했던 이들은 심판을 통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심판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비요 믿는 자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날입니다. 이 날을 바라보며 살았고 이 날을 준비한 자에게는 영광의 날입니다. 이 날은 역사가 마무리 되는 날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3. 예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늘 기도하며 살고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무기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가 일평생 드렸던 기도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보십시오. 네 생물(살아있는 생물체의 대표)과 이십사 장로들(성도들의 대표)이 어린 양예수 앞에 가져온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이었는데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모두 다 금대접에 담겨 하나님 앞에 올려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로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은 환상중에 모든 만물이 드리는 찬양을 듣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찬양하는 것을 듣습니다. 찬양하는 이들은 하늘의 천사와 모든 피조물, 교회와 성도를 대표하는 장로들이었습니다. 하늘 위와 땅 위와 땅 아래, 바다위와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또 심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13) 마땅히 우리는 예배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도 우리의 예배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의 내용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리고 다시 사심, 인생들을 구원하사 왕 같은 제사장 삼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9~10) 또한 요한은 천사들이 찬송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인 천사들이 하는 찬양의 소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이었을까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모든 피조물 그리고 천군천사들의 찬양앞에 네 생물과 장로들은 다만 ‘아멘’하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한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했습니까? 여러분이 그 분의 사람이요 그 분을 위해 전부를 드릴 준비가 되어 있나요? 성경의 말씀대로 인류는 마지막 시대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믿음 또한 점점 분명해지고 담대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더 뜨거워져야 하고 은혜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어둠을 뚫는 것은 빛입니다. 죄를 떨쳐내는 것은 구원의 은혜와 감격입니다. 베드로는 마지막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2~13) 십자가의 능력으로 시대를 이기는 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노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중에 기다리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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