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 | 운영자 | 2020-1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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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 (룻기 1장 19절~22절) 2020년 10월 4일(주) 큰나무교회 주일낮예배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유다 베들레헴에는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 네 사람으로 이루어진 한 가정이 살았습니다. 어느 해 유다 베들레헴에는 흉년이 들었고, 엘리멜렉 가정은 모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조금 더 낫게 살아보겠다고 내려간 것입니다. 이주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 시대에 모압 땅으로 내려갔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압에서 살게 된 지 얼마 안되어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이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조금 더 행복한 삶을 꿈꾸며 이주한 것인데 가장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아내요 두 아들의 어미였던 나오미는 충격이 컸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살기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리고는 두 아들의 가정을 꾸려줍니다. 모압여자를 택하여 두 아들의 며느리를 삼은 것입니다. 큰 며느리의 이름이 오르바요 둘째 며느리의 이름이 룻입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두 아들마저 죽게 되는데 손주도 보지 못하였으니 결혼 후 오래지 않아 되어진 일로 추정됩니다. 하여간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된 것이 모압으로 이주한 지 10년안에 되어진 일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는 하지만 나오미의 집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삶의 모든 소망이 끊어진 나오미에게 유다 베들레헴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돌보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 땅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끝끝내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 룻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1. 삶의 자리가 중요합니다. 어디에 산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것은 단순히 어떤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유다 베들레헴이냐 모압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적인 측면에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은 단순히 유다 베들레헴에 기근의 문제가 생기자 조금 더 풍요로왔던 모압으로 내려가게 되었지만 유다 베들레헴은 그렇게 쉽게 떠나서는 안되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의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제비뽑아 분배받은 땅이었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먹어야 사는 인생들이 반드시 필요한 곳, 살아야 할 곳이 ‘떡집’인데 떡집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내려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살려고 갔지만 사실 이들을 살게 하는 곳은 모압이 아니라 베들레헴이었는데 그들은 몰랐습니다. 잠깐의 괴로움, 기근을 피해 내려간 모압이 오히려 그들을 궁지로 몰아갈 줄 몰랐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이요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기쁨, 희락,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삶의 자리는 분명히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근을 만나자 모압땅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이주를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삶의 자리는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야말로 그들에게 허락하신 베들레헴에서 왕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속에 기뻐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자리를 신앙적인 측면에서 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2. 신앙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추석명절을 지났습니다. 추석 명절은 사람들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일가친척을 만납니다. 나름 성공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당당합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남들 사는 것처럼은 산다는 사람도 고향의 부모 형제를 생각하며 즐거운 귀향길에 오르지만 실패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10년만에 돌아가는 나오미야말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이방 며느리 룻과 함께 돌아가야 했던 나오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 성읍에 이를 때에 나오미를 알아본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나오미가 돌아왔음을 알아보고 놀라고 반가워 한 말입니다. 한 번 겪어야 할 일이지만 나오미는 민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20) 나오미가 ‘기쁨, 즐거움, 희락’이라는 뜻인데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으로 부르라는 것은 나오미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것은 10년 모압에서 살았던 자신의 삶을 나오미 자신이 신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는 통곡해도 시원챦을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보다 더 나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실패한 나오미 자신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겠다는 신앙적 결단이 포함된 것이기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 삼자가 나오미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면 상황은 달라지고 심각해집니다. 20절 말씀을 나오미가 한 것이 아니라 제 삼자가 말했다면 이렇게 풀어볼 수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땅, 모압으로 내려가더니 거 봐 하나님이 저주하셨지, 하나님이 치신 거야,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혼자 돌아왔어” 제 삼자가 이렇게 해석한다면 그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이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우를 범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동네 점쟁이와 다를게 없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해석하므로 당사자에게 큰 상처를 남깁니다. 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쉬운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을 포악한 군주나 독재자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기쁨과 즐거움,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는 좋으신 아버지요, 우리가 잘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모압으로 내려간 것이 잘못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엘리멜렉을 데려가시고 두 아들마저 데려가셨다고 제삼자가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죽음이요 사고이며 아픈 인생일 뿐입니다. 설령 나오미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어떤 놀라운 계획속에서 되어진 일일지라도 우리는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것은 우리의 판단영역 범위 바깥에 있는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내가 더 이상 잃을게 무엇인가? 신앙도 필요 없고 하나님도 필요 없다.어차피 이렇게 된 것 아무렇게나 살자 나를 건드리지 마라.’ 라고 한다면 나오미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가막힌 10년의 삶을 정리하고 돌아온 나오미는 ‘기쁨, 즐거움, 희락’이라는 자신의 이름 대신 괴로움 이라는 뜻의 ‘마라’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에는 신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 되어진 일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출발 선상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결단이 들어가 있는 눈물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엎드리는 자, 눈물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는 자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3. 돌아가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남들이 주목하고 손가락질 할게 눈에 보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누군가 인생의 큰 성공을 이루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고향이요 부모 형제이며 일가친척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누군가 크나큰 실패로 처참하게 무너져 좌절속에 있을 때에도 가장 먼저 떠올려 지는 것은 고향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성공했을 때 뿐 아니라 실패하여 힘겨울 때에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들은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며 돌아갈 본향이 있기에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나그네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호흡이 끝나 더 이상 숨쉬지 않는 상태가 죽음인데 우리는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어디로 돌아간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간 것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찾아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 그 것이 죽음이요 이 것을 우리는 돌아간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유다 땅 베들레헴 ‘떡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며 살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자신의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기근을 피해 모압 땅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은 후에야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가 베들레헴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삽니다. 믿음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자신의 무능력함과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누구의 잘못이었던지 나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삶에 처하였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자포자기 하는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선택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고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기 시작했더니 고목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을 피우기 위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를 거쳐 사흘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이 ‘마라’ 였습니다.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를 거치는 사흘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 한방울 입에 대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라라는 곳에 도착하였더니 그 곳에 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그 것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쓰디쓴 물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수 있었습니다.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괴로움, 고통’이라는 이라는 뜻입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의 괴로움과 고통을 기쁨과 즐거움, 행복의 삶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의 인생, 살아보겠다고, 성공하겠다고 발버둥쳤지만 오히려 더 큰 절망과 고통을 맛보아야 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나오미 그의 이름대로 기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나오미를 나오미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라’ 즉 괴로움 가운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나오미’로 살게 하십니다. 즉 기쁨과 즐거움 희락 속에서 천국을 맛보며 살게 하십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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