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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가져오는 사람 운영자 20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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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가져오는 사람

(사무엘상 146~15)

2020927() 큰나무교회 주일낮예배

 

우리의 삶의 현장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녹녹치 않습니다. 경쟁 사회가 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살기 위한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뒤처지면 도태되고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팽팽한 현장속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보이는 것은 화려해보이고 대단한 것 같아도 막상 그 사람은 심각한 삶의 위기속에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꿈꾸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거나 스포츠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어내기도 합니다.

오래전 미국 드라마 주인공인 소머즈 처럼 먼 거리의 소리를 듣고 달려가 악당들을 물리치거나 언더우먼이나 육백만불의 사나이처럼 멀리 보고 빨리 달리며 엄청난 힘이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것 영웅이 되는 것처럼 자신을 그 주인공에 대비하며 환상속에서 위로를 받곤한다는 것입니다.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도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걸어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매일 매일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에 그 것은 도전일 수밖에 없고 순간 순간 쉽지 않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블레셋의 영향력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은 스스로 무엇을 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블레셋에 조공을 바치며 눈치를 봐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마지막 사사라고도 불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도 초대 사울왕이 세워졌지만 국가로서의 변변한 틀을 갖추지 못한 채 블레셋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사울의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대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불리한 조건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오는 발판을 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이었고 다윗과 형제의 언약을 맺었던 요나단이었습니다.

 

1.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해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블레셋을 대적하여 용기있게 일어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여건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전쟁의 경험 또한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블레셋을 대적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눈치나 보며 조공을 바치며 살았던 이스라엘은 전쟁을 위한 변변한 무기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삼상13:19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라고 말하고 삼상 1322절에는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라고 말합니다. 기가막힌 상황이 아닙니까? 무모한 싸움인데 그렇다고 무조건 머리를 숙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만들어졌지만 십중팔구 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블레셋과의 대립과 전쟁속에서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만 이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하면 맞습니다. 어찌보면 실패가 당연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도 안되는 상황속에서도 도전하게 하는 힘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도전하게 합니다.

6절에서 요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에게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는 부족해도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은 믿음없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믿음없는 자들, 세상의 가치, 그들의 말하는 힘은 칼이요 창이며 돈이며 세상 권력입니다.

믿는 자들이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칼과 창, 돈과 권력이 힘이 아니라 승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력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고,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불리한 형국이지만 요나단은 도전합니다. 다 안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고 머뭇거릴 때 그는 믿음으로 도전합니다.

다시 요나단은 함께 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

전쟁의 승리가 사람 숫자나 무기의 좋고 나쁨에 달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가는 자가 됩니다. 그는 도전했습니다. 남들이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도전하는 자가 되었고 그의 도전은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직무유기요 신앙인의 죄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땅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책망받고 쫒겨나 슬피우는 신세가 됩니다.

그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조선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되었는데 50년전만 해도 겨우 작은 목선이나 만드는게 고작이었던 시절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짓겠다고 영국 은행에 차관을 빌리기 위해 찾아갑니다. 그 때 5만분의 1지도 한 장, 조선소를 짓겠다는 백사장 사진 한 장, 유조선 도면 한 장을 가지고 차관해달라고 하니 거절당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래고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국 바클레이 은행에 영향력이 있어 추천을 해줄수 있는 롱바텀 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여기에서도 거절을 당합니다. 그 때 정주영 회장이 고민하다가 지갑속 500원 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말했답니다. 우리 민족은 이미 1500년대에 이런 배를 만든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설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추천서를 받습니다. 이렇게 추천서를 받아들고 갔지만 영국 바클레이 은행에서는 또 퇴자를 놓으면서 선주에게 배의 주문서를 받아와라 그러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가 싼 배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주문 계약을 따내고 결국은 계약을 따냅니다. 이게 현대 중공업의 시작입니다. 현대 정주영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그의 어록이 되었습니다.

자네 해보기는 했어

 

정주영 회장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지만 자기신념을 가지고 현대를 일으켰습니다. 하물며 믿음의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가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요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2. 기도로 싸우는 사람입니다.

일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기도가 먼저일까요?” 대답은 참 잘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살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일 때문에,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데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서 손가락 빨아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제발 잘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일을 주고 바쁘게 했더니 이제는 일감이 많아서,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일을 가져가시고, 한가하게 하신다면 그 때 가서 기도하겠습니까?

올라가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보다 앞서는 것은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기도로 시작했어도 끊임없는 기도와 간구로 자신의 일과 계획을 점검해야 하고, 악한 영이 틈타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인을 정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그들이 올라오라’(10)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의 손에 넘겼음으로 올라갈 것이요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리라’(9) 하면 올라가지 않을 것이라고 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지 말라고 하시는 사인으로 알아듣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방법을, 표징을 보이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올라가지만 이 것이 하나님의 함께 하신다는 사인을 받기 원했습니다.

이 것이 일보다 기도가 먼저인 자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은 민족과 나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단한 기도는 아닐지라도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 그래서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고 안테나를 세우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하는 것,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는 것, 안테나를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바쁘고 분주해도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이 먼저가 아니고 기도가 먼저입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일이 시작되었어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기도는 승리를 가져오는 열쇠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임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3.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요나단 한 사람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병기든 자를 데리고 나타난 모습이 블레셋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무모하고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요?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에게 이르기를 올라오라고 합니다.

요나단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자신들에게 붙이신다는 사인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습니다. 아까운 목숨을 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무모한 데 이 일을 시행하려는 요나단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이 싸움, 누구도 나서지 않은 이 싸움에서 돌파구를 찾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자신이 죽어서라도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요나단의 살신성인의 마음이 깃들여 있습니다. 설령 자신이 죽어서라도 그 것이 이스라엘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블레셋과의 싸움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 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충성은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것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 왕비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신앙결단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나라갔던 유다의 백성들은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사라는 나라가 섰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종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사왕 아하수에로의 재임 때 하만의 음모로 인하여 몰살될 위기가운데 놓입니다. 이 때 아하수에로 왕비였던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갑니다. 비록 왕비일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음에도 나아갔다가 왕이 홀을 내밀지 않을 경우 폐위되던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촌각을 다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자신도 금식하며 기도한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자세로 왕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는 유다 백성들의 목숨을 구합니다.

죽고자 하면 살지만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의 길을 여십니다.

혈혈단신, 병기잡은 자와 함께 올라간 요나단은 이 십여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입니다. 이 십여명을 죽였다고 전쟁의 승패가 갈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블레셋으로 올라가 적의 진영을 휘젓고 이 십여명을 죽인 사건은 기고만장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묶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은 당연합니다.

반대로 요나단의 무모한 도전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블레셋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볼만하다.’ ‘이길 수 있겠다.’ ‘해보자는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망망대해에 떠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외로운 배, 전진하기 힘든 이스라엘에 돛을 달아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승산없는 싸움같고, 승리의 확률이 조금도 없는 이스라엘에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는 자, 승리를 가져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 개척자가 될 수 있습니까? 누가 올라가는 용기의 사람이 됩니까?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사람은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이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점검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가 그 주인공이 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올라가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자가 승리를 가져오는 믿음의 용사가 됩니다.

주저하지 말고 승리를 가져오는 믿음의 사람으로 쓰임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용사들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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