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교의 밀알이 된 이도종 목사 | 김승규 | 2014-1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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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의 밀알이 된 이도종 목사 . (14.10.12)
창원서지방 교역자 부부 수양회 3박 4일의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한 곳이 이기풍 선교기념관과 제주 대정교회다. 이기풍 선교사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이지만 제주 대정교회를 담임하다 순교한 이도종 목사는 처음 접하는 순교자였다. 그러나 제주 선교 역사에 있어 이도종 목사와 그의 순교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않다. 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그는 제주 선교를 위해 썩어진 한 알의 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도종(李道宗)은 1892년 9월 13일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에서 태어났다. 서당교육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이도종은 17세 때 제주 선교사로 부임하여 복음증거에 매진하던 이기풍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전도자가 되었다. 이도종은 이기풍 목사가 전도한 제주의 첫 열매였고 그의 됨됨이와 그의 신앙을 지켜본 이기풍 목사는 그를 평양신학교에 공부하도록 돕는다. 1926년 34세의 나이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도종은 전북 김제의 농촌지역에서 목회자로 첫발을 내딛는다. 김제중앙교회 담임목사로 항일에 남다른 견해를 가진 이도종 목사는 일본 경찰의 감시대상속에 있다가 결국 시국과 관련한 발언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고향 제주도 출신 첫 목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를 은혜의 땅으로 만들자’는 다짐을 하며 1929년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서귀포교회, 중문교회등 10여개 교회를 개척하며 제주지역 농어촌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쳤다. 1948년 4월 3일부터 7년 7개월 동안 계속된 제주 4.3사건와중에 교회와 성도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 서귀포, 협재, 조수교회등 5동의 교회가 불에 탔고 이도종 목사르 비롯한 11개교회 16명의 성도가 무장폭도들에 의해 피살된다. 당시 이도종 목사는 고산교회 담임으로 인근 화순교회, 대정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1948년 6월 그 날에도 만류하는 이들의 뒤로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성도들을 위로하고 함께 예배하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산길을 넘는 도중 무장공산폭도들에 붙잡힌다. 그는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취조를 받았고 “예수교가 그렇게 좋다면 공산인민이 이 싸움에서 이기도록 기도 해주시겠습니까?”라는 조롱의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 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소”라고 대답했다. 그는 흠씬 두들겨 맞고 구덩이에 내 몰렸다. 그는 죽음이 눈 앞에 있음을 알고는 잠시 자기의 가방을 달라고 한다. 그는 가방에서 성경, 찬송, 회중시계를 꺼내 “나는 하나님 곁으로 갈 것이니 이 것들은 당신들이 나누어가지시오. 부디 여러분도 예수 믿고 후일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라고 했다. 구덩이에 흙이 뿌려지기 시작하자 이도종 목사는 무릎을 꿇어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아버지,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모릅니다. 저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주옵소서. 주여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그렇게 순교한 것이다. 실종되었던 이도종 목사는 이듬해 고산에서 생포된 폭도에게서 이도종 목사의 회중시계가 발견되므로 그의 순교상황이 생생하게 알려지게 된다. 이도종 목사가 순교한 구덩이를 발굴했을 때 입고 있던 비둘기색 두루마기와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의 유해로 발견되었다. 처음 알게 된 제주 출신 1호 목사이자 제주 첫 순교자인 이도종 목사의 순교를 통해 우리의 목회를 돌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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