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교의 불꽃, 이기풍 선교사 | 김승규 | 2014-10-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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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의 불꽃이 되다. : 이기풍 선교사 (14.10.05)
이기풍 선교사는 1868년 평양 태생이다. 그는 구한말 포졸 출신이었는데 돌팔매질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는 대동강변을 중심으로 편을 갈라 행했던 전통 돌팔매 싸움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이기풍은 평소 전통 미풍양속을 깨뜨리고 서양 귀신을 전한다고 생각한 서양선교사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선교사의 집을 향해 돌을 던져 난장판을 만들기도 하고, 1890년(23세) 지나가는 마펫 선교사(한국명:마포삼열)에게 돌을 던져 턱에 큰 부상을 입히게 된다. 이랬던 그가 청일전쟁의 위험을 피해 원산으로 옮겨가 있는 도중 스왈른(W.L. Swallon 한국명; 소안련) 선교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전도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그에게 오버랩 된 것은 평양에서 자신이 던진 돌에 턱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마펫 선교사였다. 지난 일에 골몰하던 그가 잠시 잠든 사이 그는 꿈을 꾼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이가 나타나 ‘기풍아, 기풍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그는 이 것을 계기로 회심하였고, 1896년 스왈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비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턱을 크게 다쳤던 마펫 선교사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 스승의 턱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에 깊이 찔렸겠는가?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으로 그해 9월 한국장로회 총회에서 안수받아 장로교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었고 장로교 독노회 파송으로 제주선교사로 가게 된다. 최근에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제중원에서 수술 받아 병을 고친 김재원이 한국장로회 총회에 복음의 불모지 제주도 선교를 위한 전도자 파송을 요청하므로 이기풍 목사가 선교사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는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1908년 2월 20일 목포에서 배를 타고 부임하던 이기풍 목사는 풍랑을 만나 소식이 끊겼고 44일만에 무사도착이라는 전보를 보낼 수 있었다. 이기풍의 제주도 선교는 1901년에 있었던 카톨릭과 제주도민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유혈충돌이었던 신축교난으로 인해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민은 기독교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여 기독교는 원수요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제주선교에 지치고 지친 이기풍 목사는 마펫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 평양으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는데 마펫 선교사의 답장은 이러했다. “편지를 잘 받았소, 그런데 아직 당신의 돌에 맞은 내 턱이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노력하시오.” 이기풍 목사는 엎드려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영성을 회복한다. 제주선교의 문은 의외의 만남에서 열렸다. 귀신들려 아무에게나 행패를 부리고 사람들을 몹시도 불안하게 했던 한 청년을 집에 데리고 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렇게 기도하고 씨름해도 나가지 않던 귀신이 사생결단하며 기도하고 찬송할 때 드디어 항복하여 나갔고, 청년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청년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이 소문이 제주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1912년 제주선교 4년만에 8개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교인수가 4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1918년 광주교회에 부임하기까지 제주선교에 헌신했고 일제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75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는 성경 구절을 애송했던 그는 말씀대로 믿음의 삶을 살다 간 위대한 전도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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