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교의 틀을 놓은 김재원 장로 | 김승규 | 2014-0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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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교의 틀을 놓은 김재원 장로 (14.09.28)
제주 선교 역사속에 먼저 알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그가 김재원이다. 그는 1878년 10월 제주 이호리에서 아버지 김진철, 어머니 김인애의 3남 2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8세에 한학에 입문하였고, 12세에는 인근의 향촌으로 알려진 거노리로 유학했으며 16세에 자신보다 두 살 위인 최도원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17세 되던 해에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삼년동안 제주의 이름난 의사들을 찾아다녔으며 심지어 용하다는 점쟁이, 무당까지 찾았지만 그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1896년 김재원의 나이 19세에 아버지 김진철은 웬만한 난치의 병도 능히 잘 고친다는 서울의 제중원 소식을 듣게 된다. 전 가산을 들여서라도 장남을 기어이 살려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환자인 장남을 범선에 싣고 해로로 근 10일 만에 제물포를 경유 서울의 제중원(현 연세의료원)을 찾는다. 그러나 제중원의 의사요 선교사였던 에비슨 박사는 김재원의 상태가 너무 늦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음을 알고 수술불가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 수술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하는 김재원의 간청에 에비슨은 김재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혹 수술 하다가 죽더라도 그의 영혼만은 구원받게 하려는 에비슨의 생명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비슨 선교사의 집도하에 진행된 1차 수술의 결과는 실패였지만 4년에 걸쳐 전후 7번의 내종 대수술을 받으면서 병마와 싸운 김재원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병마와 싸우는 4년 동안 김재원은 소래교회 설립자였던 서상륜을 만나고, 서상륜이 병원의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주며, 쪽복음을 통해 병실 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백정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된 박세양을 만나 교제하면서 깊은 신앙을 갖게 된다. 1900년 23세의 나이로 7년간의 병마를 이기고 김재원은 드디어 제주도로 귀향하게 되고, 쪽복음 성경을 다량으로 가지고 들어와 전도인으로 살기 시작한다. 1904년 아버지가 돌아가자 김재원은 큰 결단을 하는데 아버지 장례에 제사를 거부하고 기독교식으로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일가친척은 물론 동네사람들 까지 들고 일어나 김재원을 멍석에 말아 ‘믿음을 포기하라’ 며 때리기 시작했다.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아들 김재원을 내버려두면 죽겠다 생각한 어머니 김인애가 멍석말이 당한 아들 위에 몸을 얹고 소리쳤다. “이 애를 내버려두시오. 제주의 모든 의사들도 못 고쳤고, 용하다는 무당, 점쟁이도 어찌할 수 없었던 내 아들을 예수가 고쳤다는데 오늘부터 나도 예수를 믿겠소” 결국 문중사람들은 회의 끝에 김재원을 문중에서 내?고 김재원은 그에게 돌아올 모든 재산도 포기하게 된다. 이후 김재원과 그의 어머니 김인애, 동생 김재선이 가정예배처소를 시작하게 되는데 자생적 기독교 공동체의 탄생이 된 것이다. 이 후 김재원은 장로교 본부에 제주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장로교본부에서는 1908년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어 이기풍 목사의 제주선교가 시작된다. 그해 2월 성내 향교골에서 처음 예배를 시작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는 매서인으로 쪽복음을 들고 계속하여 전도하였다. 1917년 40세의 나이로 홍형홍과 함께 제주도의 최초 장로가 되어 제주 선교초기 교회의 초석을 다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45년(68세) 4월에 전남 보성군 겸백면 남양리로 피난 중 8.15 조국 해방을 맞았으며 10월 광주시 서석동 106의 2로 이사하여 살다가 1946년(69세) 4월에 광주 서석동 자택에서 소천하였다. 김재원 장로와 이기풍 목사의 제주 선교기념비가 제주도 최초의 교회인 제주 성내교회에 세워졌고, 김재원 장로는 제주선교사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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