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불꽃 어윤희 | 김승규 | 2014-02-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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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불꽃 어윤희 1909년 30세에 우연히 들른 개성 북부교회에서 정춘수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은 그녀는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 해 가을 갬블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갬블선교사의 소개로 공부할 기회를 놓친 과부나 기혼여성들을 위한 미리흠 학교에서 공부하고 이어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한(1915) 어윤희는 미남감리회의 전도부인이 되어 토산구역에서 목회를 하다가 개성성경학원 사감으로 일하던 중 삼일운동을 맞게 된다. 삼일운동 전 개성북부교회까지 독립선언서가 은밀히 전달되었지만 두려움에 덮어질 상황속에 있었던 독립선언서는 어윤희에게 전달되고 그녀는 호수돈 여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삼일운동을 준비한다.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게 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당일 오후 2시 어윤희는 왼편 팔에 독립선언서를 차고 남문으로부터 연설하며 중앙지역으로 올라왔는데 이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청년, 학생, 일반인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시위운동으로 번졌다. 어윤희는 그 날 저녁 왜경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너희가 내 몸을 묶을지언정 내 마음은 묶지 못할 것이다.”하며 포승줄에 묶였다. 경찰서로 끌려간 그녀는 시위주동자란 이유로 남들보다 더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해야 했고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경성지방 법원 검사국에 정식 기소된다. 담당검사가 취조중에 “저 앙큼한 년을 봐라, 다 아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저 년을 발가벗겨라”고 하자 ‘내 몸에 누가 손을 대, 내 몸뚱이를 보는 것이 그렇게 소원이거든 내가 벗으리라’ 하며 옷을 훌훌 벗고는 ’자,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 같을 것이고 당신의 부인도 나 같을 것이요.‘라고 말하자 취조검사가 오히려 당황하여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옷을 입혀 데리고 나가라‘ 했다한다. 결국 그는 개성만세운동의 시위주동자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그녀는 이 곳에서 이화학당 출신으로 천안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붙잡혀온 유관순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나이 어린 유관순이 독방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고 돌아올 때면 어머니처럼 그를 껴안고 위로하며 격려하였 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그는 일제의 감시로 공개적인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고, 세월만 기다릴 수 없었던 그는 개성의 유지 한철호 오기환등의 도움으로 개성시내에 「유린보육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일평생 고아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던 어윤희는 전쟁후 월남하여 서울 마포 서강에 「유린보육원」을 재건하였고 1952년에 서강교회 장로로 피택되었다. 그녀는 원장실을 따로 두지도 않았고 가장 말썽피우고 속 썩이는 아이들을 먼저 살피며 그들을 껴안고 함께 뒹굴며 그들을 바르게 길러내고자 힘을 쏟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아들의 할머니로 불렀다. 그는 그렇게 마지막 봉사의 삶을 살다가 1961년 11월 눈을 감았는데 그는 교회에 헌금하라며 2만환을 남겼고 자신의 장례에 쓰라며 4만환을 남겨 죽음조차도 준비하였던 신앙인이었다. 정부는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였으면 어두운 시대를 밝힌 선각자였던 그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신의 기가막힌 인생을 ‘사나운 팔자’나 ‘운명’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시대의 어둠을 밝힌 실천하는 믿음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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