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삭개오 백사겸
(2014.01.26)
백사겸(1860~1940)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이다. 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9살 때 열병을 앓다가 시력을 잃었으며 그 다음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게 되자 졸지에 고아가 된다. 백사겸의 형은 백사겸의 손을 잡고 구걸하며 살다가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동생이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고, 맹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복술업’ 즉 점치는 일임을 알게 되어 학비를 대주며 복술가 밑에서 점치는 일을 배우도록 주선한다. 백사겸은 4년 공부 끝에 스승보다 나은 경지에 이르렀고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산통(算筒:점치는 도구)과 죽장(竹杖:대나무 지팡이)을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 평양 대동강변에 자리를 펴고 점을 치기 시작하여 서울에 왔다가 이천과 원주를 거처 서울 근교 고양읍에 자리를 잡았다.
고양에서 이십년 가까이 점을 치다보니 『고양읍 백장님』 하면 인근에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양반 집에선 가마를 보내 초청할 정도가 되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게 되는데 어느 날 한 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점을 보러왔는데 참한 규수감인 것을 알아본 백사겸은 머리를 쓴 것이다. “이제껏 내가 본 점궤중에 제일 흉한 점궤가 나왔는데 이 집에서 나가는 순간 규수는 벼락을 맞겠구나” 하여 결국은 규수의 어머니로 하여금 딸을 자신에게 시집보내게 만든 것이다.
백사겸은 부인과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고 족집게 점쟁이로 이름을 날리며 재산을 많이 축적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에게 불안이 찾아오고 삶에 대한 회의가 들어왔다. “과연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는 만족을 갖지 못한채 태을경을 외우며 100일기도에 들어간다. 100일 기도후에는 뭔가 특별한 응답이 있을 것을 기대하였는데 마침 100일 기도를 끝내는 날 아침, 대문을 두들기며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는 고양읍 일대에서 성경책과 전도지를 팔며 전도하던 남감리회 소속 매서인 김제옥이라는 여인으로 ”이 것은 예수 믿는 도리를 적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백사겸은 재수없는 불청객이라며 쫒았지만 산신령의 신기한 응답을 기다리며 100일 기도를 드린 후 받은 전도 책이라 묘한 느낌을 받는다. 며칠 후 백사겸은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내가 주는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고 가라“는 것이었다.
꿈 내용과 전도책자에 대해 들은 장인이 전도책자를 읽어 주었는데 우주에는 천지만물을 만드신 상제가 계시고 그를 섬기는 것이 인간의 근본도리이며 따라서 우상이나 귀신을 섬기는 것은 상제께 대한 큰 죄라는 내용이었다. 백사겸은 이 예수의 도가 의의 산통임을 깨닫게 되어 매서인(성경을 팔며 전도하던 이)김제옥을 불러달라 하여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 다음주 1897년 5월 2일 고양읍 교회가 창립되던 날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후 백사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남을 속여 축적한 재산을 팔아 처분하려했던 3,000냥의 돈을 도둑이 가져갔지만 도리어 감사했고 살던 집마저도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주고 무작정 길을 떠나 전도자로 나서게 되고 그에겐 ‘조선의 삭개오’란 별명이 붙었다. 타고난 달변으로 그의 설교는 웃음과 눈물의 연속이었으며 성경을 읽어주면 듣고 외워버려 ‘걸어 다니는 복음서’라는 소리도 듣는다.
1899년 정식으로 남 감리회 전도인이 되어 장단과 파주를 거쳐 개성, 평양, 철원, 김화 등지에서 전도했고 개성 남부교회를 비롯하여 장단읍교회, 감바위 교회는 그가 직접 개척하였다. 백사겸의 삶은 예수를 받아들이고도 변화가 없고 차지도 덥지도 않으며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 시대 신앙인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