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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에서 전도인으로 김승규 201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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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에서 전도인으로(이덕수)
(2014.01.19)

금년 창원서지방 임원교육은 감리교신학대학 교회사 담당 이덕주 교수를 강사로 금요일 저녁 2시간 동안 한국 감리교회 역사의 자랑스러운 평신도 4명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덕수 전도인, 백사겸 전도인, 어윤희 장로, 최인규 권사 네 사람이다. 이덕주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 네 사람은 한국교회의 자랑이며 목회자를 부끄럽게 만든 신앙인이란다.

이덕수 전도인(1838~1910)는 경기 연천 고랑포 출신으로 길거리의 깡패출신이다. 술꾼, 싸움꾼으로 무전취식하며 남의 돈을 착취하며 악행을 일삼던 그는 전도인이 전해준 전도책자를 들고 와 읽다가 성령을 받아 완전히 새 사람이 된다. 무전취식하던 그가 지게를 지고 시장터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힘껏 남을 도왔는데 고마워하는 이들에게 “예수 한번 믿어보세요”라는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이 것을 계기로 일은 부업이 되고 전도가 본업이 되었으며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던지 이덕수의 이야기는 한양에까지 소문이 났고 강원도 선교 책임자였던 남감리교 J R Moose 선교사가 고랑포의 이덕수를 찾아 전도인으로 동행하자고 제안하여 그는 지게에 성경책을 잔뜩 짊어지고 일주일만에 춘천에 도착하고 선교사는 자전거로 춘천에 오게 되었는데 서양인을 처음 본 사람들은 기겁하여 도망하기도 하고 낯설어하여 전도가 쉽지 않았다.

이덕수의 제안으로 선교사가 춘천 읍내의 장터 중심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양인도 처음 보았지만 두 바퀴로 구르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자전거도 처음이었기에 사람들이 호기심에 모인 것이다. 이 때 이덕수 전도인이 외쳤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장터에 물건을 팔기 위해 또 물건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하나씩은 짊어지고 나타난 사람들은 이덕수의 말에 주목했다. “1년 전만 해도 나 역시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의 짐이 있었고, 자녀의 짐도 있었으며 내 몸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무거운 죄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후 이 모든 짐은 내려놓았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예수님을 믿어 평안을 누리며 행복한 인생되십시오.”

현재 권오서 감독이 시무하는 춘천중앙교회는 1907년 이덕수 전도인이 봉의동에 4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하고 시작한 것으로 춘천의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다. 그는 춘천뿐만 아니라 꽤나 먼 거리였던 인재와 양구까지도 걸어가 복음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춘천지역 이주전도 2년만에 춘천과 인근 지역에 48개 교회가 개척되었고 1,130여명의 교인을 얻었으니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복음전하는 일에만 매진하던 그는 춘천에 온지 5년 만에 급성 폐결핵에 걸려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된다. J R Moose 선교사는 출장을 간 상태였고 선교사 부인은 이덕수 전도인에게 혹 남길 유언이 있는지 물었는데 가족들에 대한 부탁이나 그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돕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덕수 전도인의 마지막 말은 유언이 아닌 놀라운 신앙고백이었고 이는 모든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며 이덕수 전도인의 전도와 신앙유언은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에도 보고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 그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1910년 4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현재 그의 묘는 춘천중앙교회 묘원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지게에 성경책과 전도 책자를 지고 다니며 전도하였기에 지게 전도자로 불리우기도 하였고 조선의 바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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