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를 아는가?
(2013.09.15)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 감리교회, 장로교회, 순복음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등 다양한 교회들과 이름은 낯설고 이상하기만 하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뭐가 다른가요? 그리고 기독교는 또 뭐구요?” 이들에게는 용어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다양한 분파가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는 구교인 카톨릭과 모든 개신교를 통칭하는 말임을 일러주고 다양한 교파들은 서로의 입장과 강조하는 부분이 다른 까닭에 만들어진 조직이요 분파지만 다양성속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기에 하나의 교회, 즉 개신교(Protestant)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한 형제요 자매로 비유할 수 있으며 한 그루의 과실나무에 가지마다 달린 과일과도 같다고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군 입대 전 울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신측 교회에서 서 너달 주일예배를 드린 적이 있지만 나는 감리교인으로 태어나 한 번도 감리교회를 떠나 본 적이 없고 감리교인으로서의 자부심 또한 누구보다 크다. 사실 이 시대는 이미 교파의 벽이 무너진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굳이 감리교회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생각 밖으로 믿는 성도들이 감리교회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특히 타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이들의 경우 왜곡되어 굳어진 이야기들을 통해 편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는 영국 국교였던 성공회의 부패와 타락속에서 일어난 신앙 성결운동과 말씀운동이 출발이요 그 중심에 웨슬리 목사가 있었고 웨슬리 목사에 의해 시작된 평신도 소그룹운동이 감리교회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양대 산맥은 감리교와 장로교다.
1884년 인천제물포항을 통해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했고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감리교회(사적 제256호로 지정됨)를 세웠고, 언더우드는 새문안 장로교회를 세웠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감리교가 드문 것은 선교지의 중복 현상과 선교과열을 막기 위해 교단별 선교지역을 분할하였기 때문인데 감리교는 충청, 강원지역을 중심으로 호주장로교회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선교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감리교회의 아름다운 전통과 신앙의 유산은 길이 물려주고 자랑할만 하다.
1. 소그룹의 원류는 속회다.
대부분의 교회들의 소그룹 조직인 구역예배, 목장, G12, 셀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감리교회의 속회(Band, Class meeting)에서 파생된 것으로 속회의 탁월성은 모두가 인정한다.
2. 단일교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감리교회는 미국 남 감리교회와 북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하므로 실질적으로 두 교단이었으나 1930년 남, 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감리교가 된 후 단일교단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교회 조직에 남녀 구별이 없다.
감리교회는 일찍이 여성목사안수를 받아들였고,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은 남녀 공히 평등하게 열려있는 직분으로 이렇게 평등하고 선명한 조직과 제도는 한국교회에 충분한 귀감이 된다.
4. 한국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학교와 병원을 중심으로 사회사업을 주도했던 감리교회는 개화단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승만 초대대통령, 헤이그의 이준열사, 3.1 만세운동의 유관순 열사, 상록수의 최용신, 백범 김구, 무궁화보급의 남궁 억 등이 하나 같이 감리교인이었다.
지식, 정보시대 정보교류가 원활하기에 교단보다는 목회자의 성향에 따라 교회의 색깔이 달라지는 시대요 이제는 예배의 형식도 거의 유사해졌으며 교단의 벽이 허물어진 것은 오랜 일이다. 보수교단의 대표격인 고신측 목사가 감리교 목사인 나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어서 놀란 적이 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성도, 겸손한 신앙자세를 갖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이 시대 교파를 따질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속한 교단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충분한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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