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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눈 김경훈 200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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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눈

 

  그리스도의 눈은 어떤 눈일까요? 생김새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이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무엇을 보았습니까?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세상, 더 앞의 것을 보셨습니다. 빛을 보고 그 빛을 불러 내셨습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있게 만드는 능력의 눈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현재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까? 그러면 상황에 복종해야 합니다. 거기에 맞추어 경험이 만들어 집니다. 그 경험은 별로 자비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볼 것을 보십니다. 그래서 볼 것을 보이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눈입니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입니다. 보는 것을 바꾸는 능력의 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 소개하자 처음에는 안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경험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골 마을 나사렛, 거기서 잘 난 사람이 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칭찬하시는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무화과 그늘에 있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명상하는 그의 진실함을 보았습니다. 그가 복음의 사자로 크게 사용될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처럼 볼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눈은 초월적 입니다. 그래서 볼 것을 믿음으로 보고 거기에 생기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눈을 가지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1. 볼 것을 보라

  세상 사람들의 눈은 수동적입니다. 좋은 것, 행복한 것을 보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가 보려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대로만 봅니다. 그래서 거기에 반응을 합니다. 합격자 명단에 있는 내 이름을 보고 싶어 하고, 세상에서 대접을 받고 잘 사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합니다. 모두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되지 않습니다. 사업 잘 되는 내 모습을 보는가 싶었더니 무서운 병에 걸린 나를 보게 됩니다. 배우자와 사이가 좋지 않는 나를 봅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들어 괴로워하는 나를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를 보는가 싶더니 모든 불행 속에 있는 나를 봅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리 저리 당하는 나의 연약한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마음도, 의지도, 건강도, 약해 헤매는 나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옵니다. 반신반의 하면서 의심하면서 억지로 만나러 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는 나다나엘 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분 나쁘고 상대하고 쉽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볼 것을 보십니다. 나다나엘이 하나님 사람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빛나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듯이 우리들도 이와 같은 영적 안목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담대하게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구나.” 과연 나다나엘에게 진실함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이 더 많았습니다. 선입관으로 예수님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속에 있는 진실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보십니까? 일터가 너무 힘드십니까? 돈은 없고, 경쟁은 심하고, 경기가 나쁩니까? 낙심되고 짜증만 납니까? 이러한 현실을 내가 보아야 하는 전부 일까요? 아닙니다, 멋지게 성공한 인생의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가정도 아이들도 잘 될 것이고, 복음으로 마음도 성격도 넉넉해지고, 삶이 여유롭고 풍성해 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나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눈앞에는 혼돈과 공허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완성된 천지만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명령하시기를빛이 있으라” 단지 어둠 속에 빛뿐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완성된 세상을 보고 계셨습니다. 둘째 날 셋째 날 아직 원하는 것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볼 것을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처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소매치기는 어느 주머니에 얼마의 돈이 있는지 보인다고 합니다. 훈련된 도둑은 들어가서 정확하게 돈과 귀금속을 집어내오는 데 10분도 안 걸린다고 합니다. 성도는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믿음으로 훈련하면 볼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힘드십니까? 그게 마음으로 보는 나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구제불능일까요? 여기서 내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대로도 아니고, 보고 싶은 대로도 아닙니다. 볼 것을 보십시오. 그러면 보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능동적으로 보도록 부름 받은 자가 바로 나인 것입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십시오.

 

2. 믿음으로 보라

  믿음으로 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욕심 부려서 주장하는 것일까요? 잘 먹고 잘 살며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일까요? 내 욕심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믿음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우상이 되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말씀을 거슬러가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믿음으로 보려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야 하는 줄은 알아도 어느새 다른 것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믿음은 사라지고 어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문제에 짓눌려서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만 중심에 모시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 전도, 봉사, 충성, 좋은 줄 알지만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그것을 받고 상을 더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그대로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대로 보기를 중단하지 않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자신과 아내가 완전히 늙었지만 볼 것을 보았습니다. 욕심으로 본다고 해서 그 나이에 아들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별을 보고 땅의 모래를 바라보면서 자손들이 이처럼 많을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약속의 말씀을 들은 지 25년이나 되었습니다. 결국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보는 25년 동안 이미 아들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과 다른 제자들이 온전하게 사용되는 날들을 보고 있습니다. 숫자도 적고 머리도 그리 좋은 자들이 아닙니다. 성질이 급하고, 싸우고, 준비도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으로 볼 것을 보셨습니다. 그 믿음이 그들을 영적으로 바로 세워 준 것입니다. 믿음은 영적세상을 움직입니다. 머리가 아니고 웅변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자기 자신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병들고 위기에 있는 나를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보는 내가, 내가 경험하는 나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심하고 믿음으로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낙원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보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건강한 나, 잘 되는 나, 영광의 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목회자나 교육자나 부모나 모두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이 위대하게 되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보는 사람 중에 이 시대 모세가 있고, 요셉이 있고, 다윗이 있고, 다니엘이 있고, 바울과 베드로가 있습니다. 세상을 밝히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눈앞의 보이는 한계와 문제와 고통보다는 볼 것을 보고,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3. 생명으로 보라

  어떻게 생명으로 볼까요? 열정을 일으켜야 합니다. 열정은 목표를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처녀와 총각이 서로 사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걸 어느 날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사람들도 다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그대로가 아니라 모두가 생기가 넘치게 됩니다. 무생물인 바위도 살아있고 새들도, 별들도 노래를 합니다. 이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보는 생명의 눈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은 이 정도가 아니라 사랑과 열정이 넘쳐납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면 모든 힘이 다 나오는데 그러려고 해도 금세 다른 것이 내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옷 술에 적어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열정입니다. 그에게는 어두움도 빛인 것입니다. 병도 실패도 낙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장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의지하여 열정을 일으키십시오. 찬송과 기도를 구원의 기쁨으로 하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기뻐하며 감사하며 볼 것을 믿음으로 보십시오. 할수록 강해지고 신비한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만세반석 열리고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으로 보는 사람은 얼굴이 굳어있지 않고 빛이 나게 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사슴처럼 빠르게 높은 곳에 강하게 서게 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눈은 또 다른 세계를 보게 하고 그 세계가 나의 삶에 임하게 만듭니다. 내가 지금 보는 세계가 나의 세계임을 잊지 마십시오.

  영국군에게 계속 밀리면서도 조지 워싱턴은 미국이 독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투마다 패배해도 링컨은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미국이 통일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힘들 때마다 찬송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고 극복할 힘을 얻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억압 받는 흑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평등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백인과 평등한 세상을 보았습니다.

  “내게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을 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볼 것을 보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를 미리 상상해 보십시오. 완전한 건강과 풍요로움을 보십시오. 마음이 어두우면 믿음의 눈은 감겨져 버리고 맙니다. 말씀에 맞추어야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날마다 스스로 확인해 보십시오.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운명을 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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