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 기독교사 | 김경훈 | 2008-12-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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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사 - 그 뿌리를 찾아서 ] 1. 160년전 고대도에 첫 '복음전령' - 선교사 귀츨라프 선교사 귀츨라프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는 서해안의 한 조그만 섬 고대도(古代島)에 1832년 한국에 최초로 온 개신교 선교사와 그가 한 달간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던 섬이다. 고대도에서 바라본 앞바다 암허스트호 통역겸 의사 대천항서 출발한 70t급 연안여객선 한일호는 원산도 안면도 영목을 경우, 1시간 만에 목적지 고대도에 닿는다. 섬 등성이에 우뚝 솟은 십자가 탑이 첫눈에 들어온다. 1백여 가구에 주민 4백여명. 면적 26만평. 보령군 통계에 따르면 가구당 월평균소득 3백여만원. 봄 새우잡이, 가을 멸치잡이 등이 주업으로 소득이 꽤 높다. 초등학교 보건지소 각 1곳, 10년전 낙도선교회의 주선으로 곽길보 목사가 개척한 고대도교회(지금은 이인환목사 시무)가 있다. 1832년7월23일, 이 섬 앞바다에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천t급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가 나타났다. 당시 고대도 사람들의 눈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로 보였으리라.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 관민(官民)의 통상에 관한 관심을 살필 목적으로 중국 연안을 거처 한국까지 온 이 배에는 독일 출신의 영국선교사 귀츨라프가 통역겸 선의(船醫)로 동승하고 있었다. 숭실대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가면 그가 남긴 암허스트호 항해기(영문)을 볼 수 있는데, 조선 서해안 기사는 극히 적은 부분이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유별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의 첫 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나라의 토지는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지만 주민은 얼마 없고 개발도 안되었다. 그만큼 밉살스런 쇄국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데…" 당시 조선은 순조(純祖․재위 1800~34) 통치 말년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수십년간 엄청난 박해를 받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세도를 부릴 때였다. 정치는 문란해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각종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 항해기도 "이 왕국은 자체적으로 독립하여 통치할 능력이 충분히 있으나 조공을 바치며 중국에 복종하여 왔다. 중국은 이 나라의 여러 파벌싸움을 조장하였고 이로써 이 왕국은 미개한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고대도에 정박한 귀츨라프 일행은 홍주목의 관리인 듯한 지방관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국왕에게 통상청원 서한과 유리그릇 옥양모 모직물 등 선물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선물 중엔 성서 한 질과 전도문서 등도 들어 있었다.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접촉했다. 배에 올라온 사람들에게 전도 문서를 나누어주기도 했고 지방 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관리들도 호의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나 주민들은 국법에 어긋난다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부과 안과 전문 의사였던 귀출라프는 주민들에게 약도 나누어주고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전도 문서를 곁들여 복음서를 주었는데 관리들은 이를 금지시켰다. 이를 두고 귀츨라프는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리라' 적고 있다. 또 그는 주민들에 대해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이를 좋아한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걸 질투하리만치 편협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한 것 같으나 이는 정부의 강요 때문이며 일대일로 대할 땐 누구나 인정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츨라프 일행이 천주교 신자로 추정되는 '양이'라는 사람과 만난 일화가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양이는 그들에게 한글 자모를 써주었고 귀츨라프는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어 그것을 한글로 베끼게 했는데 양이가 베끼면서 자꾸 손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한 것으로 보아 관헌에게 발각되면 목이 달아난다는 암시인 듯 했다. 천주교신자 '양이' 만남 이 때 천주교 신자들은 귀츨라프 일행에게 어느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여러번 물었다. 천주교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충청도 해안에 개신교 선교사가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빛을 갈망했던 우리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엿보인다. 8월초 한양에서 회신이 올 때가 임박하자 귀츨라프 일행에 대한 관리들의 태도는 점차 굳어져 갔다. 8월9일,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는 서한과 선물을 도로 돌려주며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귀츨라프 등은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주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관리들로부터 약속받은 식량 등을 공급받은 후 결국 이 미지의 나라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한 달 남짓한 귀츨라프의 복음사역은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한양특사 통상 불가 통보 귀츨라프의 한국사역은 가시적 성과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한 땅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날 바로 1천만 한국 기독교인의 믿음의 뿌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암허스트호의 조선방문 목적에서 볼 때 한 개인으로서의 귀츨라프는 본의 아니게 서구의 동양침략 전위 역할을 일부 감당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귀츨라프가 아닌 복음사역자로서의 귀츨라프의 염원은 오늘날 여전히 귀 기울여 볼만하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 이 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이 땅에 뿌려진 첫 '순교성혈' -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로버트 토마스 서울 종로입구 보신각, 매년 그 해의 마지막 시간이면 송구영신하는 제야의 종을 울리는 곳이다. 정원수로 단장된 종각자리 한쪽에는 보신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조그만 표석이 하나 있다. 그 새김글은 이렇다. "척화비가 있던 자리, 19세기 후반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서양인의 조선침투를 방어 격퇴시켰다는 의미로 세웠는바 그 중의 한 척화비가 있던 곳" 다소 거친 듯한 이 글의 이면에는 한국교회사적으로도 숱한 이야기들이 묻혀있다. 쇄국을 내세운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해로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한번쯤 기억해둘 필요가 있는 연대다. 우선 이해에는 천주교 대박해 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병인년 새해 벽두부터 종교적으로 '혹세무민'하고 정치적으로 '모반의 우려'가 있다하여 숱한 천주교인들이 무차별 체포․ 투옥․ 고문․ 학살당한 것이다. 이 핍박의 와중에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은 프랑스 로즈제독이 지휘하는 함대를 이끌고 와 이 해 9월 강화도에 상륙, 공격하였다. 병인양요라 일컬어지는 이 전쟁은 결국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통역자격 '셔먼호' 동승 '대원군은 새로운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고 서울 장안 한복판에 척화비를 세워 백성들이다 읽을 수 있게 하였으니' 지금의 보신각 앞 척화비 자리는 바로 이때의 것인 듯하다. 국내외적으로 이런 혼란이 가중되고 있던 1866년 8월, 평양의 대동강에 항해 목적이 모호한 미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머스 * 1840~1866) 선교사가 통역 자격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자다. 이 땅에 온 외국 선교사중 유일한 순교자다. 귀츨라프가 첫 복음을 전한지 33년만의 일이고, 개항과 함께 이 땅에 공식적으로 복음이 들어오기 10년 전의 일이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머스는 1863년 '이교의 잔멸과 이교도의 회심을 향한 선교사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을 임명했다는 사실을 믿으며'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로 건너왔다. 신학교 재학 중에도 학업보다는 전도의 열정을 더욱 불태운 그는 학생 신분으로 수차례 지방 전도에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졸업장도 중국에 선교하러 간다는 구실로 억지로 받아 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학업보다 전도에 열중 24세의 나이로 출발한 그의 선교사역은 그 열정과는 달리 곧 난관에 부딪혔다. 같이 온 아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곧 병사했고, 런던선교회 상해주재 책임자 무어헤르와의 불화가 겹쳐 한때 선교회에 사표를 내고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셔먼호를 타고 평양을 방문하기 한해전인 1865년에 그는 조선에 1차 방문한 일이 있다. 지푸에서 우연히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황해도 장연에서 목선을 타고 필사 탈출한 김자평 최선일 등 천주교인 2명을 만났는데 이들이 놀랍게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다는 것(당시 조선천주교회는 복음서 한 권이나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번역하려 하지 않았고 실제로 신자들에게 성경지식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백낙준 '한국개신교사')에 자극받아 조선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 해 9월 지푸를 떠나 송천이나 옹진 부근으로 추정되는 서해안 창린도의 자리리에 도착, 약 두달 반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1백여권의 성경을 나누어주기도 하며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쪽배로 서울을 향해 떠나다 폭풍우를 만나 만주 피즈우에 표루, 겨우 목숨만 건진 채 1866년1월 북경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 후 북경에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자신이 지난해 조선에 전했던 성경이 평양까지 흘러 들어갔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조선선교에 대한 열정이 달아올랐다.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프랑스 로즈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조선원정이 논의되었을 때 토머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 받았다. 그러나 이 원정은 무기 연기되었고 실의에 빠진 그에게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동승제의가 들어와 그의 2차 조선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달 체류하며 말 배워 그의 한국말과 한국해안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고 그 또한 스스로 서양 사람으로는 '유일한 조선통'으로 자부하고 있던 때였다. 한편 런던선교회는 그의 셔먼호행을 달갑잖게 여겼다.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가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8월9일 지푸를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대동강 입구 용강 주영포에 도착, 평양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조선의 쇄국정책과 부단한 외세침입과 맞물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유난히 나쁜 때인지라 셔먼호와 조선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8월27일 평양의 한사정에 정박한 배는 통상을 요구하였고 토머스는 그들의 목적이 천주교와는 다른 야수성교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배를 돌릴 것을 요구하는 조선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총포를 쏘아 사상자를 내는 등 무례하고도 강압적인 행동도 저질렀다. 9월2일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던 셔먼호는 마침내 격분한 조선 군민들의 공격을 받아 승선자들 모두 죽음을 맞았다. 토머스의 나이 27세.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먼저 도발해 화근자초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토머스의 목을 친 병사 박춘권의 말이다. 토머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성경을 뿌리며 전도했다. 이때 그에게서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마펫 선교사를 찾아왔다는 일화는 그의 최후를 암시한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한국교회는 토머스의 순교를 기려 1926년 순교 60년 기념회를 조직, 1927년 5월8일 그의 순교지에서 1천여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으며 1928년에는 오문환목사의 집필로 전기가 나왔고 1933년 9월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1933년 기념교회 세워 귀츨라프나 토머스처럼 조선에 대한 서구교회의 선교는 영구히 지속될 결실을 남기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고 지나갔다. 또 토머스를 후원했던 윌리엄슨목사의 경우처럼 '대영제국과 같은 나라들은 조선처럼 무지하고 폐쇄된 나라를 개방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요 특권'이라는 식의 믿음은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한 교파형의 미국교회에 비해 역사적 과오에 빠질 우려가 훨씬 많았고(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토머스 목사 또한 이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적 신학적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의 '복음주의적 경건'은 이 땅의 복음화를 향한 한 톨의 썩은 밀알이었음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 땅에는 토머스기념비 조차하나 없다. 며칠 후면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린다. 예나 지금이나 오욕으로 점철되기 마련인 역사지만 그 속에서 반짝이는 순교자의 열정만이라도 한번 새겨 봄직하다. <토머스 목사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3. 믿음과 집념의 결실 첫 한글성서 - 1887년 완역 '예수셩교젼셔'
예수셩교젼서 온 세계에 가정 널리, 또 가장 많이 퍼진 책은 단연 성서다. 1986년 최초로 성경전서 1백만부 반포를 기록한 우리나라는 금년에 2백만부라는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한국성서공회에 따르면 올들어 10월말 현재 성경전서 2백만1천8백94부, 신약 1백93만4천5 백77부, 단권복음서 점자성경 등 총 6천3백만여부의 성경 및 문서가 반포되었다고 한다. 인구 1인당 반포부수로는 세계 1위가 되었다. 교회사를 볼 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성서를 보급하는 사업을 벌인 세계 최초의 기관은 지금으로부터 약3백년 전인 1698년 영국 런던에서 창설된 '기독교지식 보급협회'이다. 당시만 하여도 성서는 물량도 달리고 가격도 비쌌지만 무엇보다도 사제계급의 전유물이어서 일반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세계를 상대로 한 성경보급의 발상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웨일즈 발러의 토머스 찰스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804년 출발한 영국성서공회가 그 효시다. 이어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미국성서공회 등이 결성되어 구미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각 지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들이 싼 가격에 대량으로 반포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 첫 탄생의 고고성을 울렸을까? 또 그 수태의 섭리와 해산의 고통은 어떠했을까? 천주교가 한국에 포교되고 상당한 교세를 가지게 될 때까지도 성서와 관련된 작업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귀츨라프나 토머스 목사가 갖고 온 성서도 중국의 한문성서였다. 성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 로스(1842~1915)가 만주에서 여러 한국인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는 1862년 중국선교를 시작하였고 1871년부터는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의 윌리엄슨의 지도로 산동반도를 선교지로 삼아 노력을 집중해 나갔다. 1872년 8월말 지푸에 도착한 로스는 윌리엄슨의 충고에 따라 10월에 만주의 개항장 영구로 갔다. 일찍부터 한국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토머스 목사의 셔먼호 동승을 주선하기도 했던 윌리 엄슨은 로스에게 토머스의 순교에 관해 이야기했고, 두 선배의 한국 선교 열정에 감명 받은 로스는 1874년 10월 고려문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고려문은 만주 통화현의 작은 마을로 당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합법적 교역 장소였다. 그러나 로스의 여행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1876년3월 강화도조약으로 한국 문호가 개방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로스는 두 번째로 고려문을 방문했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한국어 교사를 얻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의주상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다. 로스는 이미 한글성서 번역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학공부에 정진한 로스는 이응찬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교재 'Corean Primer'를 낼 수 있었다. 1879년 4월 로스가 영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기까지 로스와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한국 최초의 수세자 등은 1852년에 간행된 한문 '신약전서 문리'를 대본으로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를 번역하였다. 로스가 휴가를 떠난 1879년 5월부터 2년간은 그의 동료인 우장의 매킨타이어 주도로 번역이 진행되었다. 1881년초 매킨타이어는 우장에 들르는 한국 상인들을 상대로 번역한 것을 직접 시험하면서 수정하였고, 한문을 사용하는 소수 식자층이 아닌 '오직 대중에 적합한 것을 목표로' 일의 가닥을 잡아갔다. 로스가 돌아온 6월부터는 심양 문광서원으로 작업장이 옮겨진다. 번역방법에 있어서도 일대 진전을 보게 되었다. 한문성경에서 1차 번역을 하면 로스 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하여 2차 번역을 하고 이것을 제1번역인이 정서해주면 다시 로스 등이 재수정하고 주석 성구사전 등을 참고하여 어휘를 통일 번역을 마치는 순서를 취했다.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완벽한 문자"라고 경탄한 바 있는 로스는 한글의 우수성과 함께 최신 그리스어 성경을 이용함으로써 한문성경보다 훨씬 정확한 번역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1883년에는 사도행전까지 최종 번역본을 만들었고 이듬해부터는 서신서 번역을 본격화하여 1886년 가을에는 신약전서의 번역을 완료하였다. 이제 인쇄 출판의 문제가 남았다. 사실 출판 사업은 애당초 로스가 2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1881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번역이 진행되는 한편에서 출판도 병행해 나갔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그 해 9월부터 인쇄에 들어갔다. 성서 인쇄 전에 먼저 소책자의 시험인쇄가 있었는데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라 할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이 10월초에 인쇄되어 이듬해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반포된다. 시험인쇄에 성공한 로스는 1881년 말부터 누가복음을 필두로 인쇄에 들어가 1882년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가 세상 빛을 보게 된다. 각고 끝에 탄생한 이 옥동자의 생김새는 어떠했을까? 누가복음에 이어 1882년 5월에는 요한복음 3천부를 간행했다. 누가복음과는 달리 본문은 '하느님' 앞에서 한 칸씩 띄어쓰기를 하였다. 1883년 10월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묶은 단편과 1882년에 낸 요한복음의 수정판을 간행했다. 1882년 판에 '하느님'으로 표기됐던 신명이 1883년부터는 '하나님으로 바뀌었으며 서울말 채택도 늘어났다. 이렇게 단편이나 할본 형태로만 발행되다가 남은 서신서를 추가하여 1887년 마침내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가 묶어져 나오게 된다(구약성서는 1910년4월2일 완역되어 19111년 신약성서와 함께 '성경젼셔'로 합본 간행되었다. 물론 이때의 신약은 '예수셩교젼셔' 와 다른 번역본이다) "한국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는 로스의 고백처럼 비록 '예수셩교젼셔'의 번역이 로스에 의해 추진되었지만 그 실제번역이 한국인 개종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로스본이라고 하기보다는 '예수셩교본'으로 부름이 더 타당할 것이다(기독교역사연 '한국기독교의 역사'). 1885년 인천으로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한글성경이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국인 번역자들은 일자리나 호구지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확실히 배우고, 또 전하고자 했던 열렬한 신앙인들이었고 이들의 유산은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초선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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